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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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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다.

SOHO아이디어 2019. 4. 1. 14:45

제주 4.3 사건을 아시나요?

오는

4월 3일은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4월에는 만우절

그리고 식목일과 한식 등

여러 행사의 날이 있지만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서

한번 알아보려 합니다.

 

그럼 이어서

제주 4.3 사건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도록 하겠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무력 충돌과 그에 따른

진압 작전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제주도 4.3 사건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됐지 때문에

흔히 제주 4.3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1947년 3월 1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7년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약 3만여 명이 모여서

제28주년 3.1 절 기념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를 거의

군사 요새처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섬 곳곳에 요새를 지어댔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 놈들은 제주도민들을

강제로 부려먹고 도민의 재산을

뺏어가는 등 엄청나게 착취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 바로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3년 동안

미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 가뜩이나

미 군정이 주민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정책을 펴서

불만이 쌓여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

족치던

친일 경찰들이 다시 들어오게

되어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

제주도 4.3 사건의 시발점입니다.

 

1947년 3월 1일 대규모 집회 당시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시위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사람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게 된 것입니다.

 

제주 4.3 사건의 기록을 보면

어린아이 및 노인들을 포함하여

6명 사망과 8명의 중상되는

사건으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과잉진압 논란에

경찰은 되려 시위 군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제주도에 통행 금지령을 내리고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 육지에서는

수백여 명의 경찰 지원병력이

제주도에 투입 명령을 받게 됩니다.

 

경찰을 뻔뻔한 행동들에 대한

불만으로 제주도민들은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 합동 총파업 선언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의 자료를 살펴보면

이 총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4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당지 제주도 도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정부는

이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남조선 노동당에 선동된 좌익

세력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파업 시위 해제를

적극 돕고 있던 경찰들을

해산시키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서북 청년단 강경파

인물들로 채우게 됩니다.

서북 청년단은

해방 정부 때

활동했던 극우단체이며

반공을 명분으로 폭력을 일삼았던

사실상의 테러단체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때 당시의 이승만 정권은

서북청년단에게

일체의 돈을 지급하지 않고

알아서

제주도에서 자급자족하라고

명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1948년 경찰에 끌려간

제주도민 젊은이 3명이

연달아서 고문에 의해 죽는

사건이 벌이지게 됩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300여 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하면서

제주 4.3 사건의 쟁점을

알리게 됩니다.

 

1948년 11 워 17일

당시의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초토화 작전이라고 볼 수 있는

강경 진압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제주도는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토벌대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음대로 학살을 시작하였습니다.

학살 방법 중에는 차마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방법들이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총살자의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만세를 부르게 하거나

박수를 치게 하거나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으면

그 가족을 대신 죽여버리는 일도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특히

더욱 안타까운 건

마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한 번에 죽이는 일명 관광 총살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희생된

주민들이 최소 3만 명에서

8만 명으로 추측할 수 없을

정도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마을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에 치러진다고 하는데

당시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조차 할수 없을 거 같습니다.

 

1948년에 시작된 제주도 4.3 사건은

6.25 전쟁을 거쳐서 1954년이

되어서야 겨우 수그러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제주도에는 평화가 찾아오질 않았는데

희생자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유족들은 숨죽여서 울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된 지 수해 지났지만

제주도 4.3 사건의 진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2000년에

이르러서야 제주도 4.3 사건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03년에는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채택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으로 정부 차원의 사과를

진행하였습니다.

 

이걸 계기로

2008년에는

평화공원이 세워졌으며

2014년에는 제주도 4.3 사건이

국가 추념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주도 4.3 사건의

피해 배상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많은 분들이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제주도 4.3 사건의 그날의

진실이 꼭 밝혀지길 바라면서

이상으로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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