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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일어난 이유

SOHO아이디어 2019. 6. 21. 13:11

625 전쟁이 일어난 이유

6.25 전쟁 잊을 수 없는 상처

1950년 6월 25일 새벽

"여보 눈좀 떠 봐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봐요."

"새벽같이 무슨 일이야?."

"이 소리 안 들려요."

아무래도 뭔 큰일이 일어

난 거 같다니깐요."

"어!! 정말 뭔 전쟁이라도

난 거 아니야.?"

"근데 뭐 잠깐 총싸움하고

말겠지. 우리 국군이

가만히 있겠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5시

북위 38선을 넘어온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됩니다.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시키겠다는 야욕으로

기습 전쟁을 일으킨 북한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당시 소련과 중국의 많은

도움을 얻으며 군사력이

막강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남한은

북한군의 탱크부대와

막강한 인민군들에 의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수많은 목숨을 바치면서

맞서 싸운 우리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전선은

처참히 무너졌으며

 

1950년 6월 27일

전쟁 발발 2일 만에

급하게 열린 국제 연합

안전보장 이사회

 

그때 당시 소련이

불참하면서

국제 연합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가 발표되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제공한다.'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 내용은 190만 명의

국제 연합군

(영국, 호주, 캐나다, 터키 등)

총 16개국의 연합군을

남한에

파견시키기로 동의합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전쟁 발발 3일 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7월 20일에는

중부전선인 제2수도

대전이 넘어갔으며

8 울 18일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면서 남한은

밑으로 계속 밀리게 됩니다.

계속되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전선을 따라 이동하는

피란민들의 생활은 정말

고달팠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1950년 8월은

북한군과 남한군

모두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낙동강에까지 내려와 있던

우리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남한이 그토록

기다리던 반전의 소식

우리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빼앗긴 수도 서울을 되찾기

위해

필사의 반격을 시도합니다.

 

국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작전이 시작되었고

작전 개시 1일 만에

인천 진입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

국제연합군이 전쟁의

흐름일 바꿔 놓게 된

인천 상륙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1950년 9월 28일

3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서울의 곳곳에선

태극기가 휘날렸고

서울을 떠났던 수많은

피란민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으로 거침없이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우리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10월 19일

평양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

 

모든 사람들이 전쟁은 이젠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압록강 상류까지

진격한

우리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군이 참전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을 앞세운

인해전술 앞에 우리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어쩔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바뀌게 된

전쟁의 아성 속에

우리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다시 밀려나

후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되었고

힘을 모았던 우리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습니다.

 

'혼란'

너무나

치열하게 전투를 하면서

승패를 장담할 수 없던

625 전쟁

국제연합군의 막강한 화력과

인해전술을 펼치면서 반격한

중국군

모두 생사를 넘나들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의

회오리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625 전쟁 중에 시작된

휴전협상

1953년 7월

오랜 협상 끝에 남과 북은

휴전을 하게 됩니다.

1954년

한반도의 거취를 두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스위스 제네바 회담이

열렸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이유

 

그러나 아쉽게도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치면서

아무 성과 없이 끝난

스위스 제네바 회담

결국 대한민국은

긴 휴전상태로 오늘날에 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남긴 수많은 상처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희생자를

일이킨 625 전쟁

 

60만 명의 국군과

15만 명 이상의 연합군들이

사상되거나 다치게 되었습니다.

 

민간인들 또한 많은 희생자가

발생되었고 동거 동락했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국

토는 모두 황폐해졌고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아픈 역사를 반드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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